이성과 존재의 태양을 꺼야 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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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2021-04-1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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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⑬ 이기상 교수<上>

 이기상은 가톨릭 모태 신자로 신부의 길을 가기 위해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성신고등학교에 다녔다. 신부 지망생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성신고등학교 기숙사 골방에서 ‘나는 누구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같은 물음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가톨릭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972년 벨기에 루뱅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갔다. 그의 자전적(自傳的)인 글에 따르면 유학 가서 처음 일 년 동안 유럽의 그리스도교가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신앙의 정신이 사라진 유럽의 교회는 관광객을 위한 박물관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유럽 사람들은 평생 교회에 3번 간다는 농담을 합니다. 태어나서 세례 받으러, 결혼식 하러, 죽어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3번 교회에 간다는 거죠. 여기서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인간이 자기가 믿고 싶은 식으로 만들어낸 그 신은 더 이상 없다는 의미인 것이죠. 니체는 하느님은 교회 안에 있지 않다고 말했어요. 교회는 죽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죠.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친구 집에 식사를 초대 받아 갔는데 아파트가 높은 층에 있었습니다. 바깥 창문으로 내다보니까 온통 아래가 벌건 십자가로 뒤덮여 있더라고요. 유럽과는 전혀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갔다가 철학으로 바꾼 이유가 궁금합니다.
“유럽의 신학 정신을 배워서 한국에 이식한다는 생각은 모순이라고 느꼈습니다. 유럽의 노쇠한 기독교를 들여오는 것은 한국에서 태동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히려 죽이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3년 만에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1975년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다석 사상을 '식사는 장사'라는 화두로 압축한 이기상 교수.[사진=유수민 인턴기자]


1976년 하이데거가 별세했을 때 <슈피겔>지에 생전에 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철학을 시작해야 하는데 동양 사상이 어떤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동양의 지식인들이 현재 인류가 처해 있는 문제를 문제로서 보지 못한다면 서양의 지식인들이 결국 열쇠를 찾아낼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인터뷰에 자극을 받아 하이데거를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 하이데거입니다. 그런데 독일 대학에서 외국 사람, 특히 동양 사람들에게 연구 주제로 하이데거와 헤겔을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독일 사람도 어려운데 외국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나는 오기로 하이데거를 붙잡았습니다. 내가 최초로 독일에서 하이데거를 전공한 한국인입니다.”
그는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러나 독일의 예수회 철학대학이 신학사 학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바람에 그 대학에서 철학으로 학사 석사 과정을 다시 하고 하이데거를 연구주제로 정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다석 류영모 선생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한국인으로서 이 시대의 철학적인 주제를 어떻게 소화하고, 어떻게 우리 것으로 만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 너비, 깊이를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나는 하이데거를 통해 철학의 방법론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서구적인 신관(神觀)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이성과 존재자 중심의 사고를 비판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한국적 사상이 무언지 공부하기 위해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독일 학생이 놀랍게도 박사학위 연구 주제로 민중신학자 안병무로 정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유럽을 다 뒤져 봐도 유럽인이 동아시아, 더군다나 한국의 종교인을 박사학위 주제로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안병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병무를 통해 함석헌 선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좋아하는데, 함석헌 선생은 형이상학적 연구 대상으로는 조금 부족했어요. 나는 1984년 귀국해서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된 뒤 유럽에서 함께 공부한 교수들과 함께 우리사상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사상연구소의 동료 교수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함 선생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 선생을 공부해보라고 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한국적인 것을 찾다가 다석을 알게 된 거죠.”
-다석의 철학을 ‘태양을 꺼라’는 멋진 화두(話頭)로 압축했는데요.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성천문화재단 김홍근 연구실장이 1999년 3월 13일 다석 탄신일 특별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동안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준비한 강연의 제목이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 사유로부터 해방,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였습니다. 그 행사에 씨알 사상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다수 참석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도 ‘씨알지기’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다석이 글자 그대로 ‘태양을 꺼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석 사상에 입각해 서양철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낸 말이죠.
태양을 끄면 없는 것들, 무(無)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태양이 꺼진 밤하늘에서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갑자기 닥치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차츰 그 어둠에 익숙해지면 서서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별들 모두는 또 다른 태양들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의 태양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태양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주장하는 단 하나의 진리, 이성, 존재의 우상을 깰 때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태양을 꺼라’라는 화두에 들어있습니다. 동양에도 태양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에도 그들의 태양이 있는데, 서양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태양이 유일한 태양이고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해 다석(多夕)의 아호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저녁 석(夕)자만 세 개 모인 아호입니다. ‘태양을 꺼라’와 의미가 통합니다. 아호 속에는 저녁에 한 끼만 먹는 금욕적 삶의 태도도 담겨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최초로 독일의 일상어로 철학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하이데거를 전공한 이 교수가 “다석은 우리말로 최초로 철학을 할 가능성을 보인 사상가”라고 했더군요.
“독일어로 철학하기를 시작한 사람은 칸트입니다. 칸트도 박사학위 논문, 교수임명 자격논문은 라틴어로 썼습니다. 칸트가 독일에서 최초로 독일어로 논문을 쓴 것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이에요. 그러나 칸트도 당시 많은 개념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옮겨오면서 사유했어요. 라틴어가 가지고 있는 심층문법이 남아있는 것이죠. 하이데거는 독일의 일상언어로 철학을 했어요.
나는 독일에서 10년 살았습니다. 한 나라에 5년 이상은 살아야 일상어를 할 수 있습니다. 5년은 살아야 꿈을 독일어로 꾸기 시작해요. 그 나라 말의 심층문법을 안다는 것입니다. 나는 <존재와 시간>을 비롯해 거의 20권의 독일어 책을 번역했습니다.
나는 하이데거를 공부함으로써 일상어로 철학하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죠.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한국의 일상어를 가지고 철학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류영모 선생이 다석일지에 담은 시가 3000 수입니다. 그중 1300수는 한문 시고, 1700수가 한글 시입니다. 다석의 한글 시에서 바로 한국어의 심층문법으로 쓴 시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최초의 철학자는 시인이었어요. 독일에서 하이데거를 통해 철학하는 방법을 배웠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적인 철학의 가능성을 다석에게서 배웠습니다. 나의 전반기는 하이데거, 후반기는 다석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두 철학자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제의가 들어오면 대한민국 어디든지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 개념은 일본 학자들이 그들 식의 한자말로 표현할 것들인데 우리말 철학에 어려움은 없는지요?
“한국에 온 서양 학자들은 한국사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어를 배워야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 삶 속에서 우러나온, 거기에서 길어낸 우리말로 우리 사상을 표현하여야 합니다.
존재, 세계, 자유, 자연, 인간, 문화 등 철학에서 중요한 용어가 우리 삶의 전통에는 없었을까요. 반만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각인되어 오늘날 우리가 이어받고 있는 그런 중요 개념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어 한국인이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정리했는지 알기 위해 철학사전이나 민족대백과사전에서 ‘존재’라는 항목을 찾아보면 어디에도 한국인이 생각한 ‘존재’는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조가 이해하고 생각하여 그것으로 만물을 보며 대했던 ‘존재’라는 개념은 없고,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고 정리해 놓은 ‘존재’만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여 개념으로 정리해 놓은 것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 삶을 결정짓고 있는 중요한 개념들을 우리말로 정리해야 합니다.”

   강진군의 의뢰로 김호석 교수가 그린  다산 정약용 초상.


-이 교수가 한국의 철학사상사에서 마지막 한국의 철학자로 다산 정약용(1762~ 1836)을 거론하는 것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한다는 글을 썼던 데요.
“나는 한국 철학에 관련된 책을 많이 찾아봤습니다. <서양 철학의 수용과 한국 철학의 모색>이라는 책도 냈습니다. 책방에서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다 다산 정약용에서 한국철학이 끝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시대의 철학자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한국의 현대 우리말로 철학을 한 분은 아니죠.
다산이 살던 시대는 한국이 근대로 접어들지도 않았을 때 입니다. 최초로 한글 시를 쓰고 철학을 한 사람이 수운 최제우(1824~1864) 입니다. 수운이 <용담유사>를 처음으로 한글로 썼습니다. 다석이 1890년에 태어났습니다. 하이데거는 1889년에 태어났어요.
다산 정약용의 시대에는 집권층이 모두 다 한문을 썼기 때문에 제도를 개혁하려는 글을 쓰자니 한문으로 썼겠지요. 그러나 다석이 살던 시대에는 동서남북의 이슈가 한반도에서 들끓고 있었습니다. 반만 년 역사의 밑바닥에 흐르는 것은 민중, 서민, 씨알입니다. 철학은 씨알이어야 합니다. 씨알이 고통 받으며 자기 것으로 만든 그 결정체, 그 심층문법은 한문이 아닌 우리말 속에 담겨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같은 불후의 명저를 다수 저술한 사상가이면서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글로 쓴 저서를 단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가족과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도 모두 한문으로 썼다. 당시 지식층의 문자가 한문이었다. 언문은 여자들끼리 보내는 편지글에 주로 쓰이었다. 다산의 시 ‘보리타작’(打麥行)은 지금 읽어도 절창(絕唱)이다. 이런 시들이 한글로 쓰여졌더라면 훨씬 더 씨알 민중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新葤濁酒如潼白)
큰 사발에 보리밥, 높이가 한 자로세(大碗麥飯高一尺)
밥 먹은 뒤 도리깨 들고 마당에 들어서니(飯罷取耞登場立)
검게 탄 두 어깨 햇빛 받아 더 붉네(雙肩漆澤翻日赤)
옹헤야 소리 내며 발맞추어 두드리니(呼耶作聲擧趾濟)
잠깐 사이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해라(須臾麥穗都狼藉)
(하략)

-다석이 만든 유명한 아포리즘(잠언)에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라는 말이 있는데요. 밥 먹는 것을 하필 사람이 죽었을 때 장사 지내는 것에 비유했을까요?
“내가 다석을 공부하며 깜짝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 좋아하는 고기는 짐승들을 잡은 거잖아요. 야채도 따지고 보면 식물이라는 생명체지요. 생명체가 죽어 장사를 지내는 것이 우리가 먹는 식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명체를 죽여서 한 끼 식탁 위에 올리는지 생각해보세요.
제레미 리프킨이 <육식의 종말>이란 책에서 지구온난화의 원인 중 하나가 소라고 지적했습니다. 소가 뀌는 방귀에서 나온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가 먹어 대는 풀도 어마어마하고요. 소를 왜 기르나요. 인간이 잡아먹기 위해서죠. 제레미 리프킨은 반(反)엔트로피를 이야기하면서 엔트로피(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게 되는 현상)를 줄이기 위해서 육식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게 지구의 미래, 인간의 미래와도 이어진다는 거죠.
다석은 하루에 한 끼만 드셨어요. 다른 동식물, 생명체를 죽여서 내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은 하루에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에서는 한 달에 3만 원만 있으면 세 식구가 산답니다. 그래서 식사는 장사라는 정신으로 한 끼를 나누면 우리가 남과 더불어 사는 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눔 없이 평화 없다’라고 한 사람이 마더 테레사입니다. 다석은 영적으로 마더 테레사와 통한 것이죠.”
-다석은 ‘생명’이란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볼 것을 강조했다고 했는데요. 다석의 생명사상과 요즘 신학계의 화두인 생태신학과 맥이 통합니까?
“다석의 위대함이 생명이라는 화두에도 들어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모든 연구가 이성중심적으로 가다 보니까 마지막에 기술과 과학이 나옵니다. 이성중심적 사고에서 자연은 인간의 에너지 저장 창고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술과학으로 접근해서 석탄 석유 또는 무언가를 캐내기 위해 온통 자연을 파괴합니다. 그러다가 서양에서도 자연에 대한 접근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나의 정년을 기념해 동료 교수, 지인, 제자들이 만들어준 책의 제목이 <존재는 생명의 강물>입니다. 20세기 이후 화두는 생명이어야 합니다. 자연에 대한 파괴는 지구 파괴로 이어지기 때문에 20세기 후반에 ‘환경학’이 등장합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보내는 가정 통신문에 환경 조사라는 항목이 있었어요. 거기선 집이 자가(自家)냐 전세냐, 집에 TV가 있냐, 수입이 뭐냐 등등을 적어냅니다. 환경이 이런 의미로 쓰인 데서 보듯이 환경학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중심주의입니다. 그 이후 등장하는 것이 ‘생태학’입니다. 생태는 이제 인간만의 환경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둥지, 생태 개념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자면 생태학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더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20세기 후반에 생명에 관한 책이 봇물을 이룹니다. 그 중 하나가 프리초프 카프라가 쓴 <생명의 그물>이라는 책입니다. 카프라는 동서양을 통합하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다석은 1918년 <청춘>이라는 잡지에 글을 썼습니다. “산다는 것은 때와 곳을 옮기면서, 곧 내 생명을 변증하면서 일을 하는 것이니 나와 남과 물건 세 편이 연결하는 가운데 생명이 소통하면서 진리를 나타내며 광명(光明)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서양에선 아직 생명에 대한 중요성이 나오지 않았을 때 다석은 이미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래서 나는 우리사상연구소를 하면서 제일 먼저 생명에 관한 한국적인 연구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생명사상의 화두를 던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지하.[사진=연합뉴스]


이 교수가 저술한 <다석과 함께 하는 우리말 철학> 책에는 김지하 시인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김 시인은 <눈물>이라는 시에서 ‘먹고 또 먹고/죽이고 또 죽여/지구를 깡그리 부시고 있는/지금 여기/나’를 고발한다. 김 시인은 <빗소리>라는 시에서는 ‘추위를 끌고 오는/초겨울의 비/산성비에 시드는/먼 숲속 나무들 저 한숨소리’라며 생명을 살리는 생명수가 독극물로 변해가는 현실을 아파하고 '내 마음속 파초 잎에/귀 열리어/모든 생명들/신음소리 듣네…'로 이어진다. 이 교수는 환경이라는 말 대신에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한 김지하의 생명철학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철학이라고 지목한다. 김 시인의 생명시에 대한 이 교수의 해설을 좀 더 들어보자.
“한국에서 생명에 대해 화두를 던진 사람은 김지하입니다. 그는 1980년대에 감옥소에서 나오면서 생명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많은 책을 썼습니다. 생명에 관한 한 김지하가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나는 김지하의 다양한 글을 읽으며 ‘김지하의 생명사건학’이라는 철학 논문을 썼습니다. 함석헌 선생에 대해서도 제가 첫 번째 철학논문을 썼고요. 다들 이들을 사상가로 보지 않을 때 나는 사상가적 안목을 알아본 것이죠.
김지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자, 김 시인이 자기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나 보고 와서 한마디 좀 해달라고 합니다. 이후 김 시인과 함께 <세계생명문화 포럼>이라고 하는 운동을 같이하게 됩니다. 생명이 20세기, 21세기를 이끌어 갈 전 세계적 철학적 화두라는 것을 나는 절감했습니다. 다석의 생명사상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최근에 낸 책이 <글로벌 생명학>입니다. 한국적인 인문학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생명학입니다. 한국 사상 중에 세계에 내놓을 것이 없잖아요. 세계 생명문화 포럼을 하고 난 뒤 2008년 생명학회를 만들고 내가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계에서 김 시인의 학회 활동이나 지원을 시기하는 교수들의 반대로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이 보류됐습니다. 그래서 생명학회 일은 더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이 교수는 생태신학 대신에 생명신학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길게 내다보면 생태신학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생태 신학’이 아니라 ‘생명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시대적 흐름을 볼 때 아까 말씀 드렸듯이 환경학, 생태학, 그 다음에 생명학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뭐냐’하면 우주 생명이라는 것이죠.”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 이주영 인턴기자>

<이기상 교수 약력>
-1947년 출생
-1965~1972년 가톨릭 대학 신학부
-1972~1975년 벨지움 루뱅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1975~1978년 독일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
-1978~1981년 독일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 대학원 석사
-1981~1885년 독일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 대학원 박사
-1984~2012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1992~1998년 한국철학교육연구회 회장
-2001~2005년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초대회장
-2002~2012년 우리사상 연구소 소장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실존철학> 등 저서와 역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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