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파르헤시아] '율곡의 제자' 윤황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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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1-12-1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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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이 있는 역사] 조선의 손꼽히는 정론직필을 함부로 폄훼하지 말라

 

[윤황의 글이 실린 '팔송봉사']



풍경을 읊었는가, 시대의 의기(義氣)를 읊었다

아침에 흰구름 흩어짐을 보았고
저녁에 흰구름 뭉치는 걸 보았네
오직 참사람의 마음이 있어서
구름따라 나고 들지 않는다네
 
朝看白雲流 (조간백운류)
暮看白雲集 (모간백운집)
惟有道人心 (유유도인심)
隨雲不出入 (수운불출입)
 
              윤황 오언절구 ‘백운대(白雲臺)’
 
용이 누우니 비늘과 가죽이 잠겼고
층층으로 솟은 산은 아홉 연못(구룡연)을 가렸네
흰구름만 하늘끝으로 흘러가는데
어찌 하여 용은 단잠만 즐기는가
 
龍臥潛鱗甲 (용와잠린갑)
層岺閉九淵 (층령폐구연)
白雲天際去 (백운천제거)
何事嗜甘眠 (하사기감면)
 
               윤황 오언절구 ‘구룡연(九龍淵)’
 
 
(환희봉은) 기쁨에 넘쳐 쭉쭉 솟아올랐으나 땅을 조망하기 어려울 뻔
(개심대는) 심장을 열어 비록 시원하게 틔웠으나 동쪽 전망이 막힐 뻔
(망고대가) 그 누대의 모양새를 활모양으로 굽히지 않았더라면
어찌 신령스런 내금강 외금강을 함께 볼 수 있었겠는가
 
歡喜縱高妨地睇 (환희종고방지제)
開心雖爽凝東觀 (개심수상응동관)
不緣臺勢窿如許 (불연대세륭여허)
那竝仙山內外看 (나병선산내외간)
 
               윤황 칠언절구 ‘망고대(望高臺)’
 
 
조선시대 금강산 풍광을 읊은 시이다. 세 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경치만 읊은 것이 아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스스로의 뜻을 펼쳐보이고(백운대),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군주에 대한 불만을 내비치기도 하며(구룡연), 모두가 잘났다고 자기 주장만 펼치는 정쟁(政爭) 속에서 유연성과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참정치가 있어야 전체의 조화와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하기도 한다.(망고대)
 

[충남 논산시에 있는 윤황의 묘.]




윤석열의 11대 조부가 뉴스에 소환됐다
 
이런 시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의 강직한 정치가였던 팔송(八松) 윤황(尹煌, 1572~1639)이다. 지난 11일 윤석열 대선후보가 찾아간 오죽헌에서, 동행한 권성동 의원(4선, 강원 강릉)이 언급했던 윤후보의 11대 조부가 바로 그 사람이다. 권의원은 윤황이란 이름이 지금의 세인(世人)들에게 낯선 것을 의식해서였는지 그가 ‘율곡의 제자’임을 강조했다. 이런 소개 방식에 대해, 일각에선 군색한 가문 자랑이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나 윤황은 율곡과의 사제(師弟) 인연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역사에 뚜렷이 남아있는 탁월하고 용기있는 언관(言官, 언론인)이다. 조선시대에서 손꼽히는 ‘미스터 바른 소리’로 평가되는 사람이다.
 
윤황은 1597년(선조 30년)에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4년뒤 감찰과 정언을 역임했고 예조정랑을 거쳐 북청판관을 지낸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정치가 문란해지자 시골로 은거한다. 인조 때인 1626년 다시 출사하여 사간(司諫, 언론), 보덕(輔德, 세자를 가르치던 관직)을 맡았다.
 
이듬해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난 뒤, 이귀, 최명길 등 주화론자(전쟁을 피하고 청과의 화의를 모색하자는 주장을 한 신하들)의 유배를 청했고, 항복한 장수는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주화(主和)는 항복과 다름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고 삭탈관직되어 유배형을 받았으나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말려 화를 면한다. 1628년 그는 다시 사간이 되었고 1635년엔 대사간에 이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그는 강력하게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이때 집의 채유후, 부제학 전식이 그를 탄핵한다. 인조는 윤황을 영동군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후 병으로 풀려났으나 1639년 세상을 떠난다. 참혹한 병란을 거듭 겪던 시절, 언론이 직언을 하는 일은 죽기를 각오한 행위라는 걸, 그 생애 전부로 보여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윤황의 초서 서간 글씨.]




카랑카랑한 언론의 경전, '팔송봉사'를 아는가
 
1866년에 나온 책인, ‘팔송봉사(八松封事)’는 윤황이 남긴 글을 엮은 것이다. 봉사(封事)는 임금에게 밀봉한 상태로 올리는 의견서를 말한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글이 실렸으나, 주된 내용은 상소문이다. 거듭된 호란(胡亂)의 국난 속에서, 청(淸)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촉구하고 반정(反正)공신들의 특권과 비리를 공격했다.
 
청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극단적인 척화론을 내놓기도 하고, 권신(權臣)들의 비리를 조목조목 지적하여 나라를 그르친 책임을 묻기도 했다. 1636년(인조14년)의 상소에서는, 공신들이 왕실과 함께 민간의 논밭과 점탈하여 경제적 이득을 독점하는 상황을 적발하고 비판했다.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임진강을 활용하는 방책과 대대적인 양병(養兵)을 주장하기도 했다. 국가 재정을 튼실히 하기 위해 왕릉의 제사와 임금의 음식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이같은 의견들은 공신 권력자들의 사나운 반격을 받았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 유배형을 받았고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도 다시 유배형에 처해진다.
 
‘팔송봉사’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계사(啓辭, 공적인 일이나 논죄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린 글)가 11편이 들어있다. 사간 시절에 올린 ‘거빈시탑전(去邠時榻前, 전란을 피해 왕이 서울을 버리고 피란가려는 때 어전(탑전)에 올림)계사’가 눈에 띈다. 그는 정묘호란으로 청군이 침입한지 7일째 되던 정월21일 인조에게 도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면서, 강화 피란의 투안(偸安, 일시적 평안)의 계책을 내서는 안된다고 직간하고 있다. 이날 오후에 다시 같은 이름으로 계사를 올렸다. 비록 평양이 적에게 떨어진다 해도 임진강의 지형과 물길을 잘 활용하고 임진강 서쪽의 수백리를 소개(疏開)해놓는다면 승산이 있다는 군사전략도 언급한다.


전하, 서울을 버리고 가시면 안됩니다
 
이틀 뒤의 계사는 ‘논거빈등사합사계사(論去邠等事合司啓辭, 임금피난 주장등의 안건에 관한 3사합동 계사)’이다. 그는 왕의 강화도 피란을 극력 반대하고, 몽골이 침입했을 때 고려 조정이 강화에 옮긴 것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고려 때는 민심의 이반(離反)도 없었고 강홍립과 같이 적과 통한 투항 장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또 소(疏) 12편이 보이는데, 이중에 “오늘 적과 화의를 맺는다면 이는 말로만 화의지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습니다”라는 척화소(斥和疏)는 인조를 격분하게 했다. 차(箚, 간단한 형식의 상소)의 형식으로 올린 것으로는, ‘간원청경동진작차(諫院請警動振作箚, 군사력증진에 관해 올리는 글)’가 있다. 윤황은 이 글에서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도입해 조선군 10만명을 양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구체적인 군비조달 계책을 숫자로 제시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율곡 이이가 주장했던 10만 양병설이 있지만, 이후 호란이 발생한 가운데 윤황에 의해 부국강병론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시 제기된 것이다.
 
윤황은 윤석열 후보의 직계조상이며, 파평윤씨 문정공파의 문정공(文正公)이 바로 그가 국왕에게서 받은 시호다. 생전에 올랐던 최고위 직책인 사간원 대사간은 오늘날의 감사원장급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생애가 역사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율곡의 제자’라는 학맥으로 소환되어야할 정도의 허전한 자리가 아니다. 조선의 언론인으로서 긴박한 전란 시대에 국가권력이 지녀야할 가치와 품격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투쟁하고 끝내 목숨을 잃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정론직필(正論直筆)의 화신이었다. 
 

[조선 숙종 37년(1711년), 윤황에게 문정공 시호를 내린 교지.]




대선후보의 광휘를 위해, 그를 들먹이지 말라
 
그러나 대선을 앞둔 시점, 야당 후보인 윤석열의 ‘가문’의 광휘(光輝)를 높이기 위해 윤황이란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그 뛰어난 인물의 생 전체를 머쓱하게 하고 욕보이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윤석열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당연히 의미가 있으며 그 다양함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그의 조상인 윤황에 대한 폄훼나 부당한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야만(野蠻)에 가까울 만큼 몰역사적이며 무지한 일이다.
 
윤황에 대해 보도를 하고 있는 언론에게도 할 말이 있다. 피란 가는 왕을 막아서고 화의를 하려는 왕에게 그건 항복과도 다름없다고 쏘아붙이는 그 기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언론 가치다. 오히려, 윤황이 이렇게라도 후세에게서 마땅히 받아야할 관심을 받게 되었으니, 저 팔송정신(八松精神)을 살려 시대의 옳음과 나라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언론이 무엇을 생각하고 정치가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를 돌이키는 계기로 삼을 만 하지 않은가.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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