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의 시선) 청춘과 핼러윈은 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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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2022-10-3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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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톤호텔 옆 골목 압사 사고 소식을 듣고 내가 오래 근무한 동아일보에서 전설로 내려오던 서울역 압사 사고가 떠올랐다.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수습기자 교육시간에 귀가 아프게 ‘서울역 압사 사고를 기억하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했을 때 편집국장은 서울역 압사 사고를 낙종하는 바람에 중징계를 당했던 선배였다.
1960년 설을 이틀 앞둔 1월 26일 밤 11시 귀성객들로 초만원을 이룬 서울역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고속도로와 고속버스도 없고 비행기는 언감생심. 고향에 가려면 열차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다.
철도청은 원래 8량인 목포행 완행열차를 18량으로 늘렸다. 계획에 없던 증차로 개찰이 늦어지는 바람에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내달리던 승객들이 좁은 계단에 몰리며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목포행 열차가 서 있던 계단과 통로에서 발생한 이 사고로 31명이 압사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안전 치안 부재가 부른 후진국형 사고
 
당시 한 신문이 조간과 석간을 함께 발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날 저녁 경찰과 사건 사고를 담당하는 1·2진 기자는 밤 12시가 다 돼 조간신문을 찍는 윤전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술자리를 가졌다. 휴대폰도 없었고 SNS도 없을 때였다. 두 기자는 아침에 다른 조간신문을 받아 보고서야 서울역 압사 사고를 알았다. 둘 다 중징계를 받았다.
154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는 서울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폭 3.2m인 내리막 골목길에서 벌어졌다. 62년 전에는 설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가려던 귀성객들이 희생자였지만 이번에는 주말에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던 젊은이들이 생때같은 목숨을 잃었다.
이태원 압사 사고로 출퇴근 시간대에 혼잡한 지하철역을 이용하는 승객들의 불안도 커졌다. 서울에서 이용 승객이 많아 극심한 혼잡을 이루는 역은 대부분 2호선 환승역이다. 신분당선과 2호선 환승역인 강남역은 하루 평균 승하차 인원이 가장 많은 곳이다.

 2호선과 3호선 환승역인 교대역은 출퇴근 시간대에 혼잡이 극심하다. [사진=황호택]

31일 아침 강남역에서는 반듯하게 명찰을 단 안전실 역무원 김광범씨가 마이크를 들고 “열차가 많이 혼잡합니다. 다음 열차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는 방송을 거듭했다. 김씨는 이태원 압사 사고 이후 지하철역 혼잡과 안전에 대해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했다. 내 옆을 지나가던 부부가 혼잡한 지하철역 계단에서 누가 밀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형 사고 나는 것 아니냐고 말을 나누는 것이 내게 들려왔다.
서울시가 2021년 서울시민의 선후불 교통카드와 일회용 교통카드 사용건수를 분석한 통계에 따르면 강남역 이용 건수가 하루 평균 6만6693건이었고 잠실역(5만6137건), 신림역(5만2716건), 구로디지털단지역(4만8010건), 홍대입구역(4만5253건)이 뒤를 이었다.
출근 시간인 오전 8~9시 하차 승객이 많은 역은 강남역을 필두로 서울역·종각역·교대역·구로디지털단지역, 퇴근 시간인 오후 6~7시에 승객이 많이 타는 역은 강남역·구로디지털단지역·서울역·교대역·시청역이었다. 강남역은 학원가와 유흥가를 찾는 사람이 많아 오후 7~9시에도 붐빈다.
강남역이 승하차 인원은 1등이지만 혼잡도 1등은 2호선과 3호선 환승역인 교대역이다. 나이 든 세대는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설과 추석 때 귀성열차 혼잡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 혼잡이 교대역에서는 거의 매일처럼 벌어진다. 교대역에서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군중에게 조금씩 밀려서 나아가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환승자들이 몰리는 길에 통로가 좁아지는 병목 구간이 여러 곳 있어서 교대역이 가장 혼잡이 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교통체증이 심한 서울에서 약속 시간을 지키려면 지하철을 타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제는 이 말도 무색하게 됐다. 특히 열차 고장으로 차량이 계속 늦게 도착하거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가 있는 날이면 20~30분씩 지각하는 직장인들이 많아졌다. 승강장이 너무 혼잡해 열차가 늦게 출발하는 일도 잦다. 전장연 시위가 있던 날 2호선 방배역 대합실이 너무 혼잡하고 열차도 계속 오지 않자 탑승을 포기하고 나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직장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열차가 혼잡하오니 다음 열차를 이용하기 바랍니다”는 안내방송에도 출근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이 차량 안으로 어깨를 구겨 넣으며 밀고 들어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이 덜 닫혀 문이 다시 열리고 “열차 문 닫습니다”는 방송을 하는 일이 서너 차례씩 되풀이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울에 콩나물 버스가 있었는데 지금은 콩나물 지하철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문을 닫고 사고 없이 열차가 달리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만원 승강장에 콩나물 지하철 겁나
 
장애인을 위한 권리 예산 등을 요구하며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이어오던 전장연은 이태원 참사 추모를 위해 일주일간 시위를 중단하기로 했다. 전장연은 30일 성명에서 “이태원에서 일어난 비극적 참사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추모 기간을 갖기로 했다”면서 “용산구 삼각지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지하철 선전전과 삭발 투쟁을 31일부터 일주일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삼각지역은 이태원 압사 사고 발생 현장과 불과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이다. 출근시간대 시위로 지하철이 지연되고 역내 혼잡도가 높아지는 데 따른 비판을 고려한 결정이다.
해밀톤호텔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이다. 불과 40m가량 내리막 골목에서 154명이 숨졌다니 믿기지 않는다. 지난달 15~16일 열린 이태원 지구촌 축제에도 인파가 몰렸다. 이태원은 구도심이라 인도와 골목길은 좁은데 해가 기울면 이태원 문화와 음식을 찾아오는 국내외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 축제도 좋지만 좁아터진 곳에서 인파가 몰리는 대규모 축제를 계속 벌일 일이 아니었다. 세월호 사태를 겪고도 안전불감증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것인가.
오전에 외출했다가 6호선 지하철을 타고 이태원역에서 내려 사고가 난 골목으로 나가는 1번 출구에서 내려봤다. 출구 앞에서 경찰이 폴리스라인을 치고 있었다. 보존된 현장에는 피해자들의 각종 유실물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젊음이 죄가 될 수 없고 핼러윈을 탓해서도 안 된다. 우리 사회 곳곳에 안전 인프라가 부재한 곳이 널려 있다. 후진국형 사고에 안전행정도 안전치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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