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영의 NK어프로치] 北 식량난, 정권과 주민들의 소리 없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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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 前뉴시스 도쿄특파원.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입력 2023-03-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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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 박사]



식량난은 북한 경제 상황과 체제 안정성을 파악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키워드가 되었다. 북한 정권의 대내외 정책을 분석할 때도 식량 사정과 상관관계를 짚어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북한 식량난이 심각해지면 체제 안정성이 흔들리고, 반대로 식량 사정이 좋아지면 체제가 안정적인지, 또 식량난이 심해지면 북한의 대외 정책이 강경해지는지 아니면 약해지는지를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북한 식량난이 북한 정권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복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식량난의 정도를 의도적으로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주민 통치에 유리할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제기되기도 한다.
북한은 1990년대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김일성 사망(1994년)에 이어 식량난에 따른 대량 아사자 발생으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체제 붕괴가 초읽기에 몰렸다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북한은 이 위기를 견뎌냈고, 체제의 내구력이 강화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북한이 핵 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엄격한 제재를 견뎌내는 나름의 힘도 ‘고난의 행군’ 시기를 통해 다져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후 30여 년 동안 북한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북한 체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왕조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일반 주민들의 생존 방식과 사고방식은 사회주의 체제 또는 주체사상과 적지 않은 괴리가 생기게 됐다. 무엇보다 당과 국가가 자신들 삶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며 체험한 것이다.
식량난과 여기에 대처하는 주민들의 생존 전술, 그리고 이것을 통제하거나 묵인하는 북한 당국의 대응 조치 등은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에도 북한 사회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가장 역동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 식량난은 핵 개발과 더불어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통일부는 지난달 20일 대변인 발표를 통해 북한 일부 지역에서 아사자가 잇따라 나오는 등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라고 밝혔다. 그보다 닷새 전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국회에서 북한 식량난과 관련해 “아사자가 속출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장관 발언을 며칠 새 대변인이 정면으로 뒤엎었으니 해명이 없을 수 없다. 대변인은 “장관의 발언은 ‘고난의 행군’ 시기와 같은 규모의 아사자는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통일부의 해프닝은 북한의 구체적인 식량 사정과 그에 따른 북한 사회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으며, 혼선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북한 식량난이 또 도마에 올랐지만 북한 미사일이 동해와 태평양 상공을 난무하고 있는 와중이라 한국과 국제사회 여론이 북한 식량난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없어 보인다. 당장 “미사일 만들 돈이면 식량난을 해결하고도 남는다”는, 대북 지원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여론의 공박이 쏟아졌다.
북한 식량난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생산과 분배, 양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생산량이다. 우리 정부(농촌진흥청)가 발표한 2022년 북한 식량 생산량 추정치는 451만톤으로 지난 10년(2012~2021년)간 북한 생산량 평균치(465만5000톤) 대비 97% 수준이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식량 생산량은 350만톤에서 430만톤 사이였는데 대량 아사 사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2022년 북한 식량 생산량은 아사 사태를 부를 정도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북한의 적정 식량 필요량은 연간 550만톤으로 추산되고 있어 해마다 70만~100만톤 정도 부족하다. 이를 국제 지원이든 수입으로 메우고 있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식량난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통일부가 장관의 국회 발언을 굳이 번복하면서까지 북한에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으니 그럴 만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나름의 통로를 통해 북한 주요 지역 생활 물가를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있는데 작년 가을에 북한 주요 도시의 쌀값이 평년과 다른 움직임을 보여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개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쌀값이 조금이라도 내리게 마련인데 작년에는 거꾸로 상승한 것이다. 쌀 생산이 여의치 않았나? 그렇게 볼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핵 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봉쇄로 대중 교역이 급감하면서 발생한 비료·농기계 부족 등. 북한 노동신문도 지난 2월 25일 “최근 (수)년간 극도로 악랄해지고 있는 적대 세력들의 책동과 중대 보건 위기와 같은 장애들은 우리 국가의 존립과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했다”며 여기에 “재해성 이상 기후까지 연이어 들이닥쳐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아 나섰다”고 주장했다.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코로나19가 발발한 해인 2020년 북한과 중국의 무역총액은 5억3905만 달러로 전년(2019년) 대비 무려 81% 감소했다. 특히 비료가 제대로 수입되지 않은 것은 토양의 산성화가 심한 북한의 농업생산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김정은도 8차 당대회(2021년 1월)에서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등으로 인한 경제난을 가리켜 “일찍이 있어 본 적 없는 최악 중의 최악의 난국”이라고 했다.
북한은 지난 2월 26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주재로 농업 문제 및 경제 현안을 논의·해결하기 위한 조선노동당 제8기 제7차 전원회의를 개최했다. 노동당 전원회의가 지난해 연말에 이어 두 달 만에 다시 열린 것도 이례적이지만 농업 문제를 단일 의제로 다루기로 한 것은 더욱 특이하다. 회의는 김정은 위원장이 사회를 맡고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인 김덕훈 내각 총리, 조용원 조직비서 등이 참석했다. 북한이 식량 문제를 다급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북한의 식량 생산량 자체가 아사자를 속출하게 할 만큼 예년보다 급격히 감소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생산량 못지않게 분배 측면이 식량난을 가중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북한 일부 지역에서 최근 발생하는 아사는 이른바 ‘절량 세대(식량이 떨어진 가구, 빈곤 가구)’의 아사 문제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2000년대 이후 절량 세대 파악과 대책을 강조해 왔다. 절량 세대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지원하지 못해 아사자가 나온다면 해당 단위 책임자와 상급자를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것이다. 배급제도로 인민들 생활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절량 세대의 아사 문제는 이론상 심각한 사태일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북한이 원칙으로나마 이런 조치를 내세울 수 있는 데는 식량난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는 자신감이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김정은 체제에서는 절량 세대에 대한 간부들의 책임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2020년 12월부터 함경도는 물론 북한의 주요 쌀 생산지인 황해도에서도 농민·노동자 출신 절량 세대에 아사가 발생해 북한 당국이 이에 대한 대책을 더욱 강조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최근 북한 시장에 나오는 쌀이 줄어들고 쌀값은 올라가면서 절량 세대가 많아지는 등 문제가 생기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른바 ‘돈주’로 불리는 북한 지하경제의 큰손들이 식량을 매점매석하는 일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북한 당국이 식량 분배와 유통에 대한 중앙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 당국은 최근 ‘고난의 행군’ 이후 사실상 붕괴한 배급제도와 중앙통제 경제체제를 되살리기 위해 우선 식량 판매에 대한 통제를 다잡기 시작했다.
일례로 2021년 8차 당대회에서 식량 공급의 국가 지도 강화를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그 첫 번째 조치로 그해 7월 3일 전국적으로 ‘국가식량판매소’를 설치했다. 운영은 각급 행정기관인 인민위원회가 맡았다. 여기서는 시장보다 20% 정도 싼값에 쌀과 옥수수를 팔았고, 사탕가루(설탕), 맛내기(조미료) 등 잡화도 취급했다. 처음에는 시장의 가격도 함께 내려가는 등 효과가 있었다. 문제는 팔 물품이 부족해서 개점휴업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자 이제는 북한 당국이 농민들에게 시장이 아닌 ‘국가식량판매소’에 쌀을 팔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북한 농민은 수확이 끝난 후 국가에 바치고 난 나머지 생산물을 곡물 장사꾼에게 팔거나 시장에서 직접 판매하는 등 스스로 처분할 수 있다. 북한 협동농장은 ‘포전담당제’를 실시한다. 즉 3~5명으로 짜인 한 조 안에서 각 개인에게 농경지를 나누어 관리하게 하고, 수확된 농산물은 군량미 등 국가계획분과 비료, 농기구 등 사용료를 제외하고 남는 양을 국가와 농민이 일정 비율로 나누는 것이다. 2004년 시범 도입했던 ‘포전담당제’는 2012년 김정은 체제 확립 이후 강화됐는데, 농민 몫을 시장이 아닌 국가가 지정한 곳에 더 싸게 팔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곡물을 숨기면서 내놓지 않는 농민들도 많아졌다. 그러자 북한 당국이 시장에서 곡물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강화했다.
북한 주민들은 당이나 국가가 자기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지하 시장경제를 일구며 거기에 의탁해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당이 인민의 삶을 보장해 주겠다며 중앙통제 경제를 되살리고 있다. 경제활동의 자유를 요구하는 주민과 체제 유지를 위해 이를 통제하려는 정권 간의 소리 없는 갈등과 전쟁이 수십 년째 지속되고 있는 북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곧 식량난이다.
 

[아주경제]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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