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 칼럼] '남북통일'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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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입력 2023-03-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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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한 관계, 일반국가 관계로 전환하면?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우리는 1948년 정부수립 이래 북한을 우리 미수복 영토로 간주하고 한반도 통일을 국시로 삼아왔다. 그리고 한국전을 거치면서 남·북한간 적개심이 깊어졌음에도 통일을 향한 국민의 염원은 식을 줄 몰랐다. 그래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진보 정부 시절 남·북한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우리 대통령이 평양과 백두산을 방문하였을 당시 우리 국민은 감격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세안 게임과 2018년 평창 올림픽에 북한 응원단이 나타났을 때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내세우고 공동입장 하였을 때 우리는 통일이 가깝다는 환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통일에 대한 염원은 단지 감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지정학적인 필요와 우리 민족의 세계로 향한 웅비를 위해서도 필요한 국가전략적 목표인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가 남·북한으로 나뉘어 적대시할 경우 우리 민족은 주변 강국의 전략적 경쟁판 위에서 한낱 졸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이용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측간 경계심과 다른 정치체제로 인한 이질감으로 통일은 어렵더라도 남·북연합 또는 낮은 연방제 수준의 우호, 협력관계 구축이 전략적으로 검토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환상에서 우리가 깨어나야 할 시점이 되었다. 우리 앞길에는 통일을 향한 장밋빛보다는 전쟁의 핏빛이 더 짙게 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않고 우리가 막연히 통일을 지향하거나 북한을 흡수통일 할 수 있다는 기존의 사고를 버릴 때가 되었다. 더욱이 북한이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에 사로잡혀 필요한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안보는 더욱 위험해지고 전쟁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앞으로 통일을 추진하거나 북한과 화해,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작금의 국제정세를 조금만 짚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첫째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고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통일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북한이 핵을 가진 채 미국과 화해하거나 핵을 가진 북한을 두고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할 리가 만무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한·미동맹은 물론이고 우리 안보구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둘째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 구도는 날이 갈수록 더 강고해지고 있다. 즉 미·중간의 패권경쟁은 더욱 장기화될 것이고 피폐해진 러시아는 중국의 ‘보조 협력국(Junior Partner)’이 되어 소위 한미일 남방 삼각연대와 북중러 북방 삼각연대 간의 대립구도는 더 심화될 것이다. 이것은 통일을 향한 남·북한간의 내부 구심력도 약화되는 가운데 이를 거스르는 외부 원심력은 더욱 강해지는 형국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정세 속에서 우리가 통일이나 화해,협력을 지향한다면 우리의 헛된 열망을 주변 국가들은 이용하려 할 것이고 이로써 우리가 지불해야 할 외교·안보적 비용만 점증하고 결국 성과도 없을 것이다.

셋째 북한이 지난 9월 핵무력정책법에서 밝혔듯이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기정사실화하고 심지어 핵을 선제사용할 수도 있다고 천명하였다. 지난 90년 이후 열세에 있던 남북한 관계를 북한은 핵무장을 통해 역전시킬 수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북한은 핵공갈이나 제한적 핵무력 사용을 통해서 남한의 적화통일도 가능하다는 계산을 한다면 남·북대화에 순순히 응해 올 리 만무하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 내부에서 통일과 화해, 협력을 향한 헛된 전망으로 서로 정쟁만 일삼으면 우리 결속력을 스스로 갉아먹는 우를 범하는 꼴이 된다.

이런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이제는 통일과 화해, 협력을 지향하기보다는 남북한 관계를 새로운 틀에서 재정립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즉 남북한 관계를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규정한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두지 말고 일반국가간 관계로 만들자는 말이다. 남북한이 유엔 회원국으로서 유엔 헌장에 따라 양국 관계를 규율해 나가되 특수관계라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과 위험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사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논의될 때 북한은 유엔 동시가입이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온다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으로 이미 두 개의 국가가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것을 국제사회가 인정하였고 그것이 또한 현실이다. 남북한 각자 유엔 회원국일 경우 두 나라간 양국 관계는 유엔 헌장 2조를 따라야 하는데 이는 ‘양국은 분쟁을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해야 하며 유엔의 목적과 양립하지 않는 어떤 방식으로도 무력위협이나 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북한이 유엔 회원국 의무를 준수하리라 기대하는 것도 순진하다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남북한 모두를 위해서 남북한 관계를 일반국가 관계로 변화시키자는 제안을 해봐야 한다. 양측 관계를 일반국가화하면 다음과 같은 이점이 생겨날 수 있다. 우선 북한은 줄기차게 미국을 자국에 대한 안보위협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미국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악의 축’이나 기껏해야 ‘불량 국가’로 여기거나 ‘무너져야 할 정권’으로 간주하고 있는 데에서 기인한다. 미국의 이런 안보관이 바뀌지 않는 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북한의 실상이 어떻든 북한을 일반국가로 간주하고 그렇게 대해주면서 유엔 회원국으로서 의무를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편이 태도변화를 유도하는 데 유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냉전시대 남북한 체제경쟁을 하며 우리 외교안보 자산을 많이 허비하였다. 그 뒤 체제경쟁에서 우리가 이긴 이후에도 역시 통일과 북한 비핵화를 위하여 외교안보 자산을 허비해왔다. 이제는 블랙홀처럼 우리의 소중한 자산을 탕진하게 만드는 성취불가능한 통일과제에 더 이상 우리가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남북한 관계를 일반국가화하여 한반도 안정을 확보한 후, 우리는 험난해지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가 헤쳐 나갈 길을 찾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반도를 넘어서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 안보를 챙겨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남·북한이 특수관계 속에다 아직 정전상태에 있으면 북한의 무력도발이나 침투는 정전협정 위반에 속하는 문제이기에 북한은 도발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적을 것이고 우리도 강경대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북한이 우리에 대해 심하게 경멸적인 언사를 사용해도 우리는 특수관계라는 측면에서 이를 감내하는 성향을 지난 정부에서 보여왔다. 이는 국가존엄성을 심히 훼손하는 일이고 우리 국민의 자존심에도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남북한 관계를 일반국가간 관계로 바꾸면 남북한이 향후 서로 내정간섭하지 않고 무력도발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존중은 아니더라도 덜 적대시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북한이 도발을 하면 우리가 일반국가간 관계에 준해 비례대응을 하거나 국제법에 따른 대응을 하면 된다. 그러면 한반도 정세는 훨씬 안정화될 것이고 국제정치에서 우리가 이용당하는 일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남북한 관계를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한 ‘담대한 구상’으로 바꾸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일반국가간 관계로 변경함으로써 한반도 안정을 도모하고 전쟁을 회피하는 길이 더욱 대담하고 창의적인 발상이 될 것이다. 합선 가능성이 높은 불량한 전선에 전류를 흐르게 하는 것보다 차단하는 것이 차라리 안전을 위해 낫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특임대사 △주호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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