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 = 연합뉴스]



26일 향년 89세 일기로 별세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세계적인 탈냉전 기류 속에서 과감히 '대(對) 공산권' 외교 정책을 추진해 북방 정책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임 중 소련 해체기를 맞은 노 전 대통령은 정권 수립 후 최초로 북한의 우방이자 우리와는 적대 관계였던 소련, 중국과 손잡으면서 냉전시대 종식을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2월 취임사를 통해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며 과감한 인식 전환을 예고했다. 결국 임기 내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이루면서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외교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남북 간의 협력 기반을 마련한 것도 주요 성과로 평가된다. 

◆정권 수립 후 최초 공산권 국가와 외교

노태우 정부는 취임 첫해인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통해 북방외교 의지를 밝혔다. 이후 1989년 2월, 동구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정식 수교를 맺었고, 이어 같은 해 11월 폴란드, 12월 유고슬라비아와 잇달아 정식 수교 관계를 수립했다. 1991년 8월 알바니아까지 동유럽 7개국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는 공산권 국가의 수장격인 소련을 공략했다. 노태우 정부는 '태백산'이라는 암호명으로 1990년 6월 소련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9월 전격 수교를 맺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1990년 6월 미국 한복판에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한·소 정상회담을 통해 동서 냉전 종식을 선언한 장면은 외교사에도 큰 성과로 기록됐다.  

동유럽 국가와의 교류로 물꼬를 튼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한·중 수교로 정점을 찍었다. 한국은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를 맺으며 속도를 냈다. 노 전 대통령은 수교 한 달 뒤인 1992년 9월 베이징을 국빈 방문해 양상쿤 당시 국가주석과 첫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1949년 이후 43년간 단절됐던 중국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양국 교역 규모는 1992년 63억8000만 달러 수준에서 한·중 수교 이후 20년 만에 35배 성장했다.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는 남북기본합의서 등 북한과의 협력 기반을 마련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첫 남북 고위급 회담 성사,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 남북 관계는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었다. 1989년 9월 첫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킨 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 재정립에 나섰고, 이를 통해 1991년 말 남북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과 비핵화 공동선언이라는 토대를 마련했다. 

◆'전두환 후계자' 멍에...현대사 어두운 면 장식 

다만 노 전 대통령에겐 '전두환의 후계자'란 멍에가 평생을 따라다녔다. 노 전 대통령은 육군 9사단장이던 1979년 12월 12일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그는 12·12 군사반란 참여와 5·18 유혈 진압 책임론, 수천억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퇴임 후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됐고, 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결국 그는 전 전 대통령과 나란히 법정에 서는 운명을 맞으며 한국 정치의 명암을 관통했다.
 
이후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지만, 추징금 미납 논란에 시달리다가 지난 2013년 9월에야 뒤늦게 완납했다.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을 완납하면서 "1만분의 1의 도리를 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투병생활 중 직접 광주를 방문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광주를 방문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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