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영 선언 30주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이건희의 절박함이 삼성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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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 기자
입력 2023-06-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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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회고하며 자서전에 남긴 말이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캠핀스키 호텔. 전 세계 200여 명에 달하는 삼성 임원을 불러 모은 이 선대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선언했다.

국내 1위에 안주해 국제화 시대에 맞춰 혁신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진단에서다. 이 '신경영 선언'은 향후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한 계기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선대회장이 이 같은 선언을 하게 된 것은 그만큼 절박함이 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당시 글로벌 경영환경의 격변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일류가 돼야 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어야 하는데, 삼성의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신경영 선언에 이르기까지 이 선대회장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일류 회사에 대한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이 선대회장은 1993년 2월 삼성전자 관계사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LA에서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 비교 평가 회의를 주재했다. 삼성전자의 제품들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현지 매장에서 삼성 제품은 고객 외면으로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1993년 6월 4일. 이 선대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삼성의 경영 현장을 지도해 온 일본인 고문들과 삼성이 지닌 문제점에 대해 회의를 했다.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디자인부서를 지도했던 후쿠다(福田) 고문은 보고서를 통해 삼성의 개선점을 지적했다. 일류 상품은 디자인과 기획·생산 기술 등이 일체화 돼야 하는데, 삼성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이 선대회장은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세탁기 조립 라인에서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 규격이 맞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 조립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사내방송 비디오테이프를 봤기 때문이다.

6월 7일, 마침내 이 선대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 새로운 삼성을 여는 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어 이 선대회장은 "20년이 넘도록 '불량은 암'이라고 말해왔다. 위궤양은 회복되지만 암은 진화한다"고 했다. 이어 "초기에 잘라내지 않으면 3~5년 뒤에 온몸으로 전이돼 사람을 죽인다"며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양과 질의 비중을 5대 5나 3대 7 정도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아예 0대 10으로 가자는 것"이라며 "제품과 서비스, 사람과 경영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공장이나 라인의 생산을 중단해도 좋다"고 선언했다.

이후 삼성은 제품의 질적 개선을 추구하는 혁신적인 조치를 도입했다. 대표 사례가 '라인 스톱' 제도다. 생산 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함으로써 문제 재발을 방지하는 제도다.

라인 스톱제와 함께 질 위주로 가기 위한 삼성의 뼈를 깎는 의지를 보여 준 사례가 1995년 3월에 있었던 '애니콜 화형식'이다. 휴대폰 애니콜의 품질이 경쟁사에 비해 뒤처지자 500억원어치의 제품을 직접 소각하는 '화형식'까지 시행하며 품질경영을 위해 거액의 손실을 감수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삼성 관계자는 "이 선대회장이 절박한 심정으로 발표한 신경영 선언과 여러 조치를 통해 삼성인들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 [사진=삼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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